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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몽글몽글 담겨있는 노란 귤들처럼 평범한 장면을 바라보며 애달픈 먹먹함을 느낄 때, 나는 절대와 시간의 신비를 생각한다. 어리다고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었던 어느 젊은 날, 잠들어 있던 밤 사이 휴대폰 문자로 남겨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이름-그러니까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게슴츠레한 눈으로 여명 직전의 새카만 어둠 속에서 갸냘피 빛나는 이름을 마주 할 때도 바로 그 먹먹함이 있었다. 네가 귤을 담을 때, 시장을 볼 때, 학교에 있을 때, 잠을 뒤척이며 문자를 보낼 때, 그러니까 네가 나를 부르던 그 순간 그때 내가 함께 있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쓸쓸히 사랑하는 하루를 상상해 보았다. 정말이지 내가 계속해서 거기에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처음에는 완벽했을 사랑이 시간의 낙차를 타고 손실되는 안타까운 감각을 느끼며 먹먹한 슬픔이 들어찼다.

 

한달 전엔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아파트단지 놀이터 벤치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가녀린 벚꽃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생각하며 예비된 절대의 거대한 사랑이 흰색으로 만발해 있으나, 그것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소중한 것들을 잃고 난 뒤 부터였다. 나는 왠일인지 이걸 다 몰랐어요,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나는 속으로 말하며 울었다.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고, 그 방향으로만 걸었다. 절대적 진실과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고독과 절대적 공, 그것말고 살면서 추구할 별반 무엇이 없으니까. 다행히 나는 약간의 재능이 있었고 뜀박질이 좋았다. 백만 광년, 백 광년, 십오 광년, 3년, 한 시간, 어느 날 1초 전 까지 나의 마음이 절대와 몹시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결정적 순간에 그가 한 일은 나의 어깨를 감싸고 가만히 돌려세운 것이다. 불꽃에 뛰어들어 네 한 몸을 짓이기지 말라. 오로지 찬란한 빛만을 향하던 나의 시선이 의미를 잃어가던 박약한 장면들에 다시 꽂혔다. 그가 바라보시던 것들이다. 벚꽃도. 귤도. 모자란 내 이름도.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대신에 그의 시선을 잠시 빌려왔다.

 

너는 나와 1초라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을 한다. 내가 당신보다 일찍 도착한다면 먼저 당신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고, 내가 당신보다 늦게 도착한다면 당신의 부름을 감각할 수 있어서 좋다. 당신의 수십 년 고달팠던 인생의 끝 바로 지금 거기에 내가 서 있다면, 그 시간의 궤적과 끝이 나를 향해 있기에, 그래서 당신의 모든 인생 순간을 나는 축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너를 바라본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다. 절대에게서 빌려온 똥글뱅이 까만 안경이다. 그리고 내 뒤에 그가 있다. 나는 그에게서 돌아서 있으나 배신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가 나를 통해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능력이 없어서 이런 정도 밖에 말하지 못한다. 뭘 해도, 어떤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이걸 온전히 전할 수 없다. 시간의 낙차를 타고 뻗어나가는 몽글몽글한 감각을 아주 잠깐만 붙잡아 볼 뿐.

2023.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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